올해 들어 느끼는 게 하나 있습니다. AI 도구가 너무 많아졌다는 겁니다. ChatGPT, Claude, Gemini, Perplexity, 그리고 매주 새로 나오는 이름 모를 서비스들. 기능은 다 비슷합니다. 질문하면 답하고, 코드 짜주고, 글 써줍니다. 어떤 걸 써도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매일 쓰는 건 하나둘로 좁혀집니다. 왜일까요. 기능 때문이 아니라 "이건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감각 때문입니다. AI가 전기처럼 범용 기능이 된 지금, 진짜 경쟁은 완전히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AI는 이제 전기 같은 "기능"이 됐는가?
2026년 4월 기준, 글로벌 빅테크 5개사의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연간 690조 원에 달합니다. 2025년 380조 원에서 1년 만에 거의 두 배로 뛴 겁니다. 이 돈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면, 대부분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입니다. AI 모델 개발이 아니라 AI를 돌릴 물리적 기반에 돈이 쏠리고 있습니다.
이건 뭘 의미할까요. 적어도 범용 업무 — 글쓰기, 요약, 질의응답 — 에서는 AI 모델이 이미 "충분히 좋아졌다"는 뜻입니다. OpenAI도, Anthropic도, Google도 서로 비슷한 수준의 모델을 내놓고 있고, 오픈소스 모델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가격 경쟁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InformationWeek는 이 상황을 "AI 모델의 범용화(commoditization)"라고 표현했습니다.
전기가 처음 보급될 때를 생각해보면 비슷합니다. 초기에는 "전기가 있냐 없냐"가 경쟁력이었지만, 모두가 전기를 쓸 수 있게 되자 "전기로 뭘 만드느냐"가 경쟁력이 됐습니다. 130년 전 전기 혁명이 알려주는 진짜 이유에서 다뤘던 그 패턴이 지금 AI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95%가 실패한다
여기서 재밌는 숫자가 나옵니다. VC 업계에서는 AI 파일럿 프로젝트의 95%가 실패한다고 봅니다. 모델이 못해서가 아니라 신뢰가 없어서라는 거죠. Foundation Capital은 "기능은 어디에나 있지만, 신뢰는 드물다(Capability is everywhere, but trust is rare)"를 2026년 AI 투자의 핵심 테제로 내걸었습니다.
소비자 데이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AI 추천만 믿고 구매하는 소비자는 14%에 불과합니다. 27%는 AI 추천을 참고하되 다른 소스로 다시 확인하고, 33%는 아예 안 씁니다. AI가 똑똑한 건 다 아는데, 돈 걸고 맡기기엔 아직 불안한 거잖아요.
Fast Company는 올해 기사에서 "2026년 AI의 가장 중요한 벤치마크는 신뢰(trust)"라고 못 박았습니다. 맥킨지도 같은 결론을 내렸고요. 사용자들은 성능보다 "매번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우선시합니다. 비용이나 ROI보다 신뢰성이 1순위라는 겁니다.
신뢰를 만드는 건 모델이 아니라 제품이다
그러면 신뢰는 어디서 오느냐.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AI 도구에 "되돌리기(Undo)" 버튼 하나를 추가했더니 사용률이 크게 올라갔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AI 모델을 바꾼 게 아닙니다. 버튼 하나를 넣었을 뿐인데, 사용자가 "이건 잘못돼도 되돌릴 수 있다"고 느끼니까 더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블로그 작업에 Claude Code를 쓰면서, AI가 파일을 잘못 수정했을 때 Git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과감하게 시킬 수 있었습니다. "잘못돼도 복구된다"는 안전망이 없었으면 AI한테 파일 작업을 맡기는 건 꽤 무서운 일이었을 겁니다.
지금 성장하는 AI 제품들의 공통점이 여기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모델을 쓰는 서비스가 이기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이해하고 돌아올 수 있는 서비스가 이깁니다. 모델 성능은 기본값이 됐고, 그 위에 얹히는 사용자 경험 — 되돌리기, 설명 가능성, 일관된 결과 — 이 승부를 가릅니다.
과도기에는 뭐가 탄생하고 뭐가 사라지나
AI가 기능이 되는 과도기에 벌어지는 일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탄생하는 것 | 사라지는 것 |
|---|---|
| AI 위에 쌓은 신뢰 기반 제품 | "AI 탑재"만 내세운 래퍼 서비스 |
| 전력·인프라 사업 (물리 자산) | 모델 성능만으로 차별화하려는 스타트업 |
| 특정 산업에 깊게 파고든 버티컬 AI | "범용 AI 비서" 포지셔닝 서비스 |
| 워크플로우 자체를 바꾸는 도구 | 기존 프로세스에 AI를 얹기만 한 도구 |
690조 원짜리 인프라 투자가 말해주는 건 명확합니다. AI 모델은 전기와 같은 범용 유틸리티가 되어가고 있고, 진짜 가치는 그 전기를 가져다 쓰는 비즈니스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골드만삭스의 HALO 프레임이 물리 인프라에 투자하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이 과도기에 가장 많이 사라질 것들은 "AI를 쓴다"만으로 차별화를 주장하는 서비스들입니다. AI를 누구나 쓸 수 있는데, "우리도 AI 씁니다"는 더 이상 가치 제안이 될 수 없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AI 모델 간 성능 차이가 없다는 건가요?
차이가 없진 않습니다. 코딩, 수학, 멀티모달 같은 특정 영역에서는 여전히 모델 간 격차가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업무 — 글쓰기, 요약, 질의응답 — 에서는 어떤 모델을 써도 "충분히 쓸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Q. 비개발자에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AI 도구를 고를 때 "어떤 모델을 쓰느냐"보다 "이 도구가 내 작업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느냐"를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모델은 다 비슷해지고 있으니까요.
Q. 그러면 지금 AI 사업을 시작하는 건 늦은 건가요?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AI 기능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게 됐으니까, 문제는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와 "사용자가 신뢰할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로 옮겨갔습니다. 기술 장벽이 낮아진 만큼 도메인 전문성과 제품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 시장이 됐습니다.
마치며
AI를 1년 넘게 실무에 쓰면서 느끼는 건, 도구 자체의 성능은 이미 충분하다는 겁니다. 부족한 건 도구를 어디에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판단, 그리고 그 결정을 신뢰할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드는 실행력입니다.
관점 한 스푼.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한 일이 AI한테 글을 시키는 게 아니라, AI가 만든 결과물 중에서 쓸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이었습니다. AI는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매일 체감합니다. 결국 AI는 기능이고, 그 기능으로 뭘 만드느냐는 사람의 몫입니다. 690조 원이 쏟아지는 이 과도기에 수많은 서비스가 탄생하고 사라질 겁니다. 살아남는 쪽은 AI를 가장 잘 쓰는 쪽이 아니라, 사용자가 가장 신뢰하는 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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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Futurum Group — AI Capex 2026: The $690B Infrastructure Sprint
· Foundation Capital — Where AI is Headed in 2026
· Fast Company — AI's Most Important Benchmark in 2026? Trust
· McKinsey — State of AI Trust in 2026
· InformationWeek — 2026 Enterprise AI Predi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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